스루후(현재의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는 14세기부터 무로마치 막부에서 스루가 수호에 명령된 이마가와씨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스루후성의 전신은 이마가와씨가 지은 이마가와관이라고 합니다. 이마가와씨라고 하면, 전국 다이묘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유명하네요. 이마가와 요시모토도 이마가와관의 주인이었습니다. 이마가와 씨는 국경을 접하는 카이 쿠니의 다케다 씨, 사가미 나라의 후 호조 씨와 동맹을 맺고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이로쿠 3년(1560년)에 桶狭間의 싸움이 일어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전사하면 영국 확대를 기획하는 다케다 신겐이 이마가와씨와의 동맹을 해소합니다. 그리고 에이로쿠 11년(1568년), 다케다 신겐이 스루가 침공을 개시해, 이마가와관은 전화로 소실했습니다. 그 후, 일시적으로 다케다 신겐이 스루후를 수중에 담습니다만, 다케다씨는 1582년(텐쇼 10년)에 오다·도쿠가와 세력에 의해 멸망합니다. 다케다씨 멸망에 의해, 스루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소령이 되었습니다.
스루후 성 축성에서 메이지 시대까지
스루후를 소령으로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텐쇼 13년(1585년)부터 스루후 성 축성을 개시합니다. 천수각을 갖춘 근세성곽이며, 다음 텐쇼 14년(158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7년 보낸 토에구니하마마쓰성에서 슨푸성에 거점을 옮겼습니다. 그 4년 후의 텐쇼 18년(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공격으로 호조씨를 멸망시키고, 천하 통일을 완수합니다.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칸토 이봉이 실시해 에도를 주고 슨푸를 거론해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떠난 후의 스루후성에는 도요토미계 다이묘의 나카무라 이치씨가 입성합니다. 그 후, 에도막부를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장군직을 양도하고, 자신은 당시 스루후 번을 다스리고 있던 나이토 노부나리를 대신해 스루후성에 들어가 은거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영향력은 아직 크게 이에야스 자신도 히데타다의 정에 활발하게 입을 끼워 '오고쇼'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에야스가 은거소로서 스루후성을 선택한 것으로, 스루후성은 전국시대의 실전적인 성에서 3중의 해자를 가지는 윤곽식 평성으로 대개수가 행해져, 현재와 같은 형태가 됩니다. 특히, 천수대는 이시가키 상단에서 약 55m×48m라는 성곽 사상 최대급의 규모였던 것이, 후년의 조사에서 알고 있습니다. 또, 천수곡륜은 7층의 천수가 중앙에 세워지는 대형 천수대의 외주를 구석 망·다문 망등이 둘러싸는 특이한 구조였습니다. 게이쵸 14년(160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십남·도쿠가와 요시노부가 50만석으로 입봉한 것으로, 이에야스가 은거한 이래 폐번이 되어 있던 스루부 번이 부활합니다. 그러나, 관영 10년(1633년) 이후는 다시 막부 직할지가 되어, 독립한 스루후 번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성에는 대대로 성대가 놓여져 메이지를 맞이합니다. 스루후성은 관영 12년(1635년) 성하의 화재가 성으로 연소해, 대부분이 소실되어 버렸습니다만, 이 때, 성주가 없기 때문에 천수지가 재건되지 않았습니다. 또, 다카나가 4년(1707년)에는 다카나가 대지진에 의해 이시가키 등이 대파해, 건물의 3분의 1이 다시 소실해 버립니다. 그 후도, 안정의 대지진으로 다시 이시가키나 건물이 거의 전부 파괴하는 등, 천재 재해를 당하기 쉬운 성이었습니다. 그래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은거소로 선택한 성이며 막부의 직할지라는 것으로 그때마다 정중한 수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스루후성이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마지막 장군 도쿠가와 게이키의 시대입니다. 도쿠가와 케이키가 이끄는 막부는 게이오 3년에 대정봉환을 한 후 신정부군과 戊辰 전쟁을 발발시킵니다. 신정부군에 대패한 구 막부군은, 도쿠가와 게이키를 우에노 칸나이지에 근신시킨 뒤, 슨푸성에 입성한 사이고 다카모리에 빠져, 야마오카 철배를 사자에게 보내 협순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현재도, 시즈오카역 앞에는, 가미덴마초의 마쓰자키야 겐베에택에서 회견을 한 사이고 다카모리와 야마오카 철배의 비가 남아 있습니다.
메이지 이후의 스루후 성
스루후 성은 戊辰 전쟁 때 사이고 다카모리가 입성했지만, 큰 파손도없이 메이지 정부에 인도되었습니다. 그 후, 스루후성은 건물이 순차적으로 파괴되어, 부지의 남쪽이 현청이 되어, 그 이외는 차밭에 전용됩니다. 메이지 24년(1891년) 또, 메이지 29년(1896년)에는 보병 제34연대가 유치되어, 내호리도 매립되어 성곽 내에 남아 있는 건물도 모두 파괴됩니다. 헤이세이 원년(1989년)부터, 타쿠루를 비롯한 짤부성의 유구가 순차적으로 복원되어, 자료관으로서 공개되게 되었습니다. 헤세이 24년(2012년) 스루후 공원이 스루후성 공원에 이름을 바꿉니다. 그리고, 헤세이 28년(2018년)부터 천수대의 발굴 조사가 시작되어, 현재도 차례차례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요약
현재, 스루후성공원은 나카호리와 동변 이외의 외호리가 유구로서 남아 있어 복원된 건물과 함께, 휴일의 모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또, 공원 내에는 단풍산 정원이나 다실, 아동 공원 등이 있어, 시민의 휴식의 장소 겸 관광 명소이기도 합니다. 2023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인공의 대하 드라마도 방송되기 때문에, 이벤트도 다수 예정되어 있으므로, 활기찬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스루후성과 관련된 사건 읽기
桶狭間 전투오다 노부나가가 설마의 승리! ?
오다 노부나가가 오와리 1국의 영주로부터 천하취로 진행하는 계기가 된 것이, 에이로쿠 3년(1560년) 5월에 일어난 이마가와 요시모토와의 합전 「야오사마의 싸움」입니다. 부모의 뒤를 이어받은 얼마 안된 젊은 오다가의 영주가 「카이도 제일의 활거리」라고 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