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시로성은 나가노현 나가노시 마쓰시로초에 있던 헤이죠입니다. 다케다 신겐의 5명신의 1명으로 꼽히는 야마모토 교스케가 세운 성이라고 합니다. 에도 시대는 전국 무장 중에서도 굴지의 인기를 자랑하는 사나다 유키무라(번신)의 형, 사나다 노부유키를 조로 하는 사나다가의 거성이 되었습니다. 그런 마쓰시로성의 역사를 풀어 갑시다.
마쓰시로성의 전신은 카이즈성이라고 불리던 요새 같은 성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케다 신겐이 시나노 침공을 시도해 영토를 북쪽으로 펼쳐 가는 가운데, 나가노의 기타노부 지역 일대를 다스리고 있던 호족들을 덮은 것이, 에치고를 다스리고 있던 우에스기 켄신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에스기 켄신과 다케다 신겐은 적대해, 키타노부·카와나카지마 지역을 지배권을 둘러싸고 카와나카지마의 싸움을 반복하게 됩니다. 카이즈 성은 다케다 측의 가와나카지마 지역의 거점 성곽으로서 야마모토 교스케에 의해 구축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야마모토 케이스케는 대하 드라마가 된 다케다 신겐의 5명신의 1명에게도 꼽히는 아시가루 대장입니다. 카이즈성은 도조성·아니시카성과 함께 대상 스기씨의 최전선으로서 기능했습니다. 제4차 강 나카지마의 싸움에서는, 신하의 가스가 호랑이(타카사카 마사노부)가 성대로서 카이즈성에 농성해 다케다군 본체의 도착을 기다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또, 카이즈성은 가와나카지마 시군에서의 영국 지배·국중 지배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텐쇼 10년(1582년)에 다케다 씨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멸망되면, 카이즈 성을 포함한 시나노가와 나카지마 시코군을 지배한 것은, 오다 씨 가신의 모리나가가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다케다 유신의 자식이나 인근 마을에서 인질을 모아 성하에 살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같은 해에 혼노지의 변이 발발하여 오다 노부나가가 처치되면, 모리나가가 시나노를 포기하는 것을 결의해, 카이즈 성하에 살고 있던 일부의 인질을 데리고 미노로 퇴각합니다. 그 때문에, 카이즈성은 일시 무인이 되었습니다만, 시나노에 침입한 우에스기씨가 그대로 입성했습니다. 그 후, 게이쵸 3년에 우에스기 경승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명으로 아이즈로 옮겨지면, 카와나카지마 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창고 입지가 됩니다. 카이즈 성의 성주에게는 타마루 나오 마사가 임명되었습니다.
에도시대의 마쓰시로성
게이쵸 5년(1600년)에 세키가하라의 전투가 일어나면, 타마루 나오마사는 서군에 아군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승리함으로써 타무라 나오 마사는 성을 쫓겨났습니다. 카이즈 성은 모리 타다마사가 13만7500석으로 형의 모리나가가소연의 토지에 입봉합니다. 동시에 도요토미가의 창고지 9만석은 폐지되고, 카이즈의 땅은 「마츠시로」로 이름을 바꿉니다. 동시에 성의 이름도 대성(마츠시로)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모토와 8년(1622년)에 사나다 노부유키가 입성할 때까지 성주나 성대가 어지럽게 바뀝니다. 이후, 대성 현대의 마츠시로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후 메이지 시대까지 사나다씨가 성주를 맡았습니다. 사나다씨는, 현재의 나가노현 나가노시에 있는 젠코지몬마에마치보다 상인들을 마쓰시로의 땅으로 옮기려고 합니다만, 상인들은 거기에 따르지 않고 마쓰시로가 시나노의 땅에서 상업의 중심지가 되지 않습니다 이었다. 향보 2년(1717년) 화재에 의해 혼마루, 니노마루, 삼노마루를 소실합니다만, 막부보다 1만량을 차재해 다음해에 다시 세워집니다. 우호 2년 치쿠라가와와 시가와 유역에서 발생한 대홍수(戌の満水)가 발생하여 마쓰시로성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홍화 4년(1847년)에는 젠코지 지진이 발생하여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의 울타리, 망토, 번소 등이 도괴하는 피해를 입습니다. 이와 같이 마쓰시로성은 정기적으로 화재, 홍수, 지진 등의 재해에 휩쓸리지만, 그때마다 다시 세워져 메이지 유신을 맞이합니다.
메이지 이후의 마쓰시로 성
메이지 5년(1872년) 폐성령에 의해, 마쓰시로성은 파괴되어 터지는 밭이 되었습니다. 성주 일족의 거주였던 「하나노마루고텐」은 남겨졌습니다만, 메이지 6년(1873년)에 화재가 발생해 소실한 결과, 터지는 정지되어 주택지가 됩니다. 메이지 37년(1904년) 폐성령에 의해 번사로 나누어져 있던 토지를 당시의 사나다가의 당주, 사나다 유키마사가 매입, 혼마루 자취지를 유원지로서 개방했습니다. 다이쇼 14년(1925년)에는 분수나 판서도 정비됩니다. 그 후 니노마루 터에는 시민 수영장과 그라운드가 정비됩니다. 쇼와 26년(1951년)이 되면, 사나다 유키지에 의해 혼마루가 기부되어 공용지가 되었습니다. 쇼와 56년(1981년)에는 동그라미를 중심으로 한 성지의 일부와 신고텐이 나라의 사적으로 지정됩니다. 헤세이 16년(2004년) 타이코몬, 호리, 이시가키, 토루 등이 복원됩니다. 헤세이 18년(2006년)에는 일본 백명성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요약
현재의 마쓰시로성은 사나다 일족의 역사를 전하는 역사관 등이 있어, 에도시대의 마쓰시로성의 모습을 지금에 전하고 있습니다. 사나다 가문은 초대 마쓰시로 번의 번주, 사나다 노부유키의 아버지 사나다 마사유키, 동생 사나다 노부시게의 인기가 높고, 그들을 망쳐 매년 많은 관광객이 마쓰시로 성터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 마츠시로 성터는 벚꽃의 명소로도 알려져 있으며, 벚꽃의 계절에는 관광객은 물론, 현지 분들도 많이 성지 공원에 발길을 옮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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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나카지마 전투숙명의 라이벌,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켄신
전국 시대의 숙명의 라이벌,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켄신. 그런 2명의 무장이 격돌한 싸움이, 키타시나노(나가노현 북부)의 지배를 둘러싼 「카와나카지마의 싸움」입니다. 12년에 걸쳐 5회나 싸웠지만 결국 결착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