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자와 평야의 거의 중앙을 흐르는 犀川와 아사노가와 사이에 끼인 오타치노 대지의 첨단에 세워진, 전국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이르는 사카이식의 히라야마성이다.
가나자와성에의 교통 액세스
JR 서일본·IR 이시카와 철도 가나자와역에서 기타테쓰 버스로 약 15분 「겐로쿠엔시타」 하차, 도보 약 5분.
HISTORY가가 백만 오석의 중심지였던 가나자와성의 과거와 미래를 말한다
「카가 백만석」이라고 불린 카가번. 그 번정의 중심에 있던 것이 가나자와성입니다. 마에다 토시야가 축성해, 메이지 시대가 될 때까지 번정의 중심인 것을 계속했습니다. 한편, 여러 번 천재로 소실한다는 비극에 휩싸인 성이기도 합니다. 이 기사에서는 가나자와 성의 역사를 끈으로 갑시다.
가가는 무로마치 시대 말기부터 일향종이 자치를 깔았던 나라였습니다. 나가이 2년(1488년)에 일향 일규가 일어나 수호직, 토가시씨가 추방된 후, 문도가 거점으로서 가나자와 미도(카나자와 미도) 일명, 오야마 고보를 구축합니다. 이것이 가나자와 성의 전신입니다. 문도들은 가나자와 미도를 중심 본당이나 숙박소를 마련해, 주변에 테라우치마치를 구축합니다. 일향종에 의한 자치는 100년 가까이 계속되었습니다. 가나자와 미도의 유명한 곳으로, 가나자와 성 내에 걸리는 「고쿠 라쿠 다리」가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문도를 멸한다
일향종의 문도에 의한 자치가 끝을 알린 것은 텐쇼 8년(1580년)입니다. 천하 통일을 추진하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는 텐쇼 5년(1577년)보다 우에스기군과 계속 싸우고 있었습니다. 우에스기 켄신의 전술에 오다 노부나가는 고전합니다만, 텐쇼 6년(1578년)에 켄신이 죽은 것에 의해, 오다 노부나가는 단번에 우에스기 가의 영토를 침략합니다. 그에 맞추어 일향일규도 평정되었습니다. 이 때, 오다군을 이끌었던 것이 마에다 토시야나 시바타 카츠야, 사사 나리마사 등 중신들이었습니다. 일향중의 문도들을 멸망시킨 오다 노부나가는, 가나자와 고보를 파괴하고 가나자와성을 만들고, 그 성주에게 사쿠마 모리마사를 둔 것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에다 토시야에게 가가를 준다
오다 노부나가의 사후, 사쿠마 모리마사와 도요토미 히데요시(하니시 히데요시)가 가미가타케의 싸움에서 맞닿아, 사쿠마 모리마사와 시바타 카츠야가 토벌 죽습니다. 히데요시는 그 후 카가의 땅을 마에다 토시야에게 주어 가나자와성의 성주가 되도록 명령합니다. 이렇게 가가는 마에다가가 다스리는 토지가 되었습니다. 가나자와성에 들어간 마에다 토시야는, 분로쿠 원년(1592년)부터 성의 대개수 공사를 시작해, 곡륜이나 해자의 확장, 5중의 천수나 망을 세웁니다. 이것이 현재의 가나자와 성지입니다.
에도시대의 가나자와성
에도시대를 통해 가나자와성은 가가번번주 마에다가의 거성이 됩니다. 카가번은 메이지가 될 때까지 일관되게 마에다가에게 다스려졌고, 마에다가는 외양 다이묘이면서 막부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현재도 남아 있는 겐로쿠엔은 가가번 5대 번주 마에다 츠나키가 가나자와성에 부속되어 만든 연꽃정원이 시작되었고, 요요의 번주가 손을 더해 지금의 형태가 되었습니다. 가가번은 메이지가 될 때까지 안정된 토지였지만, 가나자와성은 낙뢰나 실화에 의해 종종 천수 등의 건물이 소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 번 리노베이션이 이루어졌습니다.
메이지 시대 이후의 가나자와 성
메이지 시대가 되어 폐번치현이 행해지면 가나자와성은 육군성에 인도됩니다. 그 후, 육군 보병 제7 연대의 본거지가 됩니다. 성의 건물은 메이지 14년(1881년)의 화재에 의해 이시카와몬·삼십마나가야·쓰루마루 창고를 남기고 소실했습니다. 그 후, 메이지 31년(1898년)에 육군 제9사단 사령부가 놓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존속합니다. 전후, 쇼와 24년 1949년에 국립 대학의 가나자와 대학이 신설되어, 캠퍼스가 가나자와 성지에 놓여졌습니다.
가나자와 성지가 나라의 사적이 된다
쇼와 25(1950)에 이시카와몬이 나라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음을 시작으로, 쇼와 32(1957) 30일 나가야가 나라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됩니다. 쇼와 53(1978)이 되면 가나자와 대학이 성내로부터의 이전을 결정해, 조금씩 이축도 시작되었습니다. 쇼와 60년(1985년)이 되면, 겐로쿠엔이 나라의 명승으로 지정됩니다. 그리고, 헤세이 8(1996)현이 나라로부터 용지를 양도해, 가나자와성 공원으로서 정비가 시작되었습니다. 헤이세이 10년대~히비시 망, 허베이 문, 다리 이치몬 2의 문, 허베이 문, 사타마 문, 사타마 다리 등이 잇달아 복원되고 있습니다.
현재 가나자와 성지
현재의 가나자와 성지는, 가나자와성 공원으로서 가나자와시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고 있습니다. 복원된 히사시 망, 허베이 문, 다리 이케몬 2의 문, 허베이 문, 사타구 문 등을 비롯하여 이시가키와 해자 등 왕년의 가나자와성을 추구하는 유구를 견학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접한 겐로쿠엔은 사계절의 꽃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명원의 하나로서 국내외에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으며, 함께 견학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계절 내내 매력이 있는 명원입니다만, 겨울, 꽃이 없는 시기에서도 눈 둘레가 풍물시가 되고 있습니다. 또, 단풍이나 벚꽃의 계절은 성지의 건물과 아울러 야간 라이트 업 등을 실시중입니다. 또한, 에도시대부터 유구한 이시카와몬, 30간 나가야, 쓰루마루 창고 등은, 년에 수회 특별 공개되고 있습니다.
가나자와성과 관련된 사건 읽기
스에모리성 전투마에다 토시야 대 핀치! 사사 나리마사와 호쿠리쿠에서 대치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측근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5대로의 1명으로서 정권을 운영해, 가가 백만석을 구축한 마에다 토시야. 그런 이가가 대 핀치에 빠진 싸움이, 텐쇼 12년(1584년) 9월 9일, 노토국(현재의 이시카와현)의 스에모리성에서 일어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