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요스 성아이치현 기요스시

여름의 기요스 성 1여름의 기요스 성 2여름의 기요스 성 3여름의 기요스 성 4여름의 기요스 성 5여름의 기요스 성 6여름의 기요스 성 7여름의 기요스 성 8여름의 기요스 성 9여름의 기요스 성 10여름의 기요스 성 11여름의 기요스 성 12여름의 기요스 성 13여름의 기요스 성 14여름의 기요스 성 15여름의 기요스 성 16
기요스 성 DATA
별칭기요스 성
축성1405년
주소아이치현 기요스시 아사히성 저택 1-1
기요스 성에 교통 액세스
JR 「키요스」역・메이테츠 「신키요스」역 하차 도보 15분.

HISTORY기요스 성에 대해서

기요스 성과 관련된 사건 읽기

세키가하라 전투천하 나누기의 전투~계기·정리·그후란?
게이쵸 5년(1600년) 9월 15일, 천하 나누기의 싸움이라고 말해진 「세키가하라의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끄는 서군이 세키가하라(기후현 세키가하라마치)에서 격돌한 싸움입니다만, 단 6시간만에 동군이 승
세키가하라 전투
桶狭間 전투오다 노부나가가 설마의 승리! ?
오다 노부나가가 오와리 1국의 영주로부터 천하취로 진행하는 계기가 된 것이, 에이로쿠 3년(1560년) 5월에 일어난 이마가와 요시모토와의 합전 「야오사마의 싸움」입니다. 부모의 뒤를 이어받은 얼마 안된 젊은 오다가의 영주가 「카이도 제일의 활거리」라고 칭함
桶狭間 전투
이나바야마성 전투오다 노부나가가 미노를 제패
에이로쿠 10년(1567년) 8월, 오다 노부나가는 미노국(기후현)에 있던 사이토씨의 본거지 「이나바야마성」을 공격해 떨어뜨려 사이토 류싱을 내려 미노를 평정했습니다. 「이나바야마성의 싸움」이라고 불리는 이 싸움 이후, 노부나가는 이나바야마성을
이나바야마성 전투
기요스 회의노부나가의 후계자가 정해진 회의
텐쇼 10년(1582년) 6월 2일, 혼노지의 이상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토벌되었습니다. 게다가 적남의 오다 노부타다도 난 속에서 자칼해 버려,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6 월 27 일 후계자를 결정했습니다.
기요스 회의
기요스 동맹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약 20년 계속된 동맹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난세의 전국 시대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양호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영록 5년(1562년)에 양자 사이에서 체결된 「기요스 동맹」입니다. 오토쿠 동
기요스 동맹

기요스성과 관련된 인물기 읽기

오다 노부나가천하 통일 전에 뿌려진 무장
전국 무장 중에서도 발군의 지명도와 인기를 자랑하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어떤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삼영걸 중 하나로 꼽히는 것뿐만 아니라, 전투에서의 에피소드부터 혁신적인 일면, 그리고 비업의 죽음까지 파란 만장한 무장입니다. 결
오다 노부나가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세키가하라의 불을 끊은 다이묘
무로마치 시대 후기, 전국 시대라고도 불린 전란의 세상은 도쿠가와가에 의해 끝납니다. 이 시대의 종지부를 친 싸움이 그 「세키가하라의 싸움」입니다. 동서로 나뉘어 10만명 이상이 대치한 이 싸움, 최초의 발포를 실시한 것이 마츠다이라 타다
마츠다이라 타다요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게가타케의 칠본 창
전국 시대,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이상에 빠진 후, 천하인이 된 무장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그 히데요시에는 소성으로서 많은 젊은이가 섬겼습니다. 카토 기요마사, 이시다 미츠나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입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와리 나라에서 태어난 히데요시의 친척입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삼법사(오다 히데노부)노부나가의 손자
전국 시대, 전국 무장은 전 이외에도 병이나 배신·암살 등 다양한 형태로 생명을 떨어뜨렸습니다. 당시 기내를 억제하고 천하 통일에 접근한 오다 노부나가도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에 의해 혼노지에서 절복, 이로 인해 크게 시대의 흐름은
삼법사(오다 히데노부)
오다 노부오노부나가 사망 후 오다가 당주
무로마치 시대 후기, 전국이라고 불리는 세계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세력을 전파합니다. 그런데 노부나가는 혼노지의 이상으로 아케치 미츠히데에 의해 자해에 몰렸습니다. 이 노부나가 사망 후의 오다가 당주가 된 것이 오다 노부오입니다. 노부오는 노부나가의 차남입니다.
오다 노부오
도요토미 히데지히데요시에게 인생을 농락한 남자
전국 시대, 전국 다이묘로서 대성하기 위해서는 보대라고 불리는 중신의 존재와 동시에 형제나 일족로당의 힘도 필요했습니다. 때로는 가신 이상의 일을 하는 일족도 있다면 여러가지 이유로 싸우거나 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다
도요토미 히데지

기요스 성을 번청으로하는 기요스 번의 역사

동그라미에 3개 아오이

마츠다이라가의 가문「마루에 세 아오이」

키요스 번 DATA
번청기요스 성
구지역오와리국 기요스
이시타카47만석
악보·외양친번
주요 번주마츠다이라씨·도쿠가와가
추정 인구26만명(메이지 원년)

전국시대, 기요스성은 수호대의 오다씨(오다야마토 모리가)의 거성이었지만, 분가 출신의 오다 노부나가가 이를 빼앗아 거성으로 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기후성, 이어서 안토성과 거점을 옮기고 나서는 기요스성의 존재가치는 극도로 저하해 간다. 텐쇼 10년(1582년) 6월,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이상으로 횡사하면,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합의하는 회의, 이른바 기요스 회의가 기요스성에서 열리고,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노부나가의 후계자는 노부나가의姡孫・三法師(나중의 오다 히데노부)로 정해져, 기요스 성주에게는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오가 정착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